한국형 핵융합로의 도전을 환영하며
정부가 2030년대 핵융합 전력 생산 실증을 목표로 한국형 혁신 핵융합로, 이른바 CPD 개발에 착수했다. 2026년 개념설계를 시작하고 2030년까지 8대 핵심기술을 개발해 2035년까지 실증한다는 구상이다. 플라즈마 제어뿐 아니라 디버터, 가열·전류구동, 초전도 자석, 증식 블랑킷, 핵융합 소재, 연료주기, 안전과 인허가를 하나의 로드맵에 담았다. 한국 핵융합 연구가 개별 실험을 넘어 발전시스템의 통합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전환이다.
한국에는 도전할 기반도 있다. KSTAR를 건설·운영하며 초전도 토카막과 장시간 플라즈마 제어 경험을 쌓았고, ITER에는 주요 장치와 부품을 공급하며 대형 초전도 시스템, 정밀제작과 원자력 품질보증을 경험했다. 조선·중공업·원자력건설·반도체에서 축적한 제조 역량도 있다. 이것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지만, 다른 나라가 만든 발전소를 기다렸다 사 오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스스로 다음 단계에 도전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제 좋은 출발을 실행 가능한 국가계획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2026년 국내 핵융합 연구개발 예산은 1124억 원이고 CPD 설계의 첫해 예산은 21억 원이다. 정부는 국비·지방비·민간투자를 합쳐 1조5000억 원 규모의 핵심기술 개발과 연구 인프라 사업도 추진한다. 이는 설계와 요소기술, 시험시설을 위한 중요한 마중물이다. 다만 이 금액을 중수소-삼중수소 통합 실증로의 최종 건설비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부 로드맵의 장점은 발전소에 필요한 주요 과제를 빠뜨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 구체화해야 할 것은 각 과제에서 말하는 '실증'의 수준이다. 독자들은 놀랄지 모른다. 현재 초전도 토카막의 대표적인 장시간 고밀폐 운전 기록은 중국 EAST가 달성한 1066초, 약 18분이다. 그러나 이는 핵융합으로 스스로 가열되는 버닝 플라즈마도, 발전소와 같은 중자·열부하를 동반한 운전도 아니다. 독일 W7-X 스텔레이터는 장기적으로 30분 운전을 목표로 하지만 원자로에 가까운 고성능 조건의 장시간 운전은 아직 연구 중이다. 전력 생산 파일럿 플랜트로 제안된 미국 ARC 설계도 약 15분간 핵융합 출력을 낸 뒤 자석을 재설정하고 하루 90여회 반복하는 방식을 택했다. 상세 계산에 근거한 목표이지만 아직 실험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인류의 핵융합 연구는 70여년을 달려왔지만 발전소 운전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아직 베이비다.
플라즈마 시나리오만의 문제도 아니다. 블랑킷 모형의 열수력 시험과 실제 중자 환경에서 삼중수소를 생산·회수하는 것은 다른 단계다. 연료주기 구성품 시험과 삼중수소를 회수·정제·재주입하는 폐쇄형 주기의 장시간 운전도 다르다. 디버터가 순간적인 고열을 견디는 것과 원자로급 열유속 아래서 교체주기까지 버티는 것 역시 같은 실증이 아니다.
따라서 '2035년 실증'이라는 하나의 종착점보다 단계별 검증으로 나누자. 비행 또는 중수소 플라즈마에서 정상상태 제어와 열배출을 수시로 반복하고, 별도 시설에서는 중자 재료, 디버터, 블랑킷과 삼중수소 계통을 병렬로 시험해야 한다. 이후 버닝 플라즈마에서 알파입자 가열, 연료공급, 헬륨재와 불순물 제거, 열 회수를 결합해야 한다. 하루나 나흘의 연속운전은 좋은 이정표이지만 한 번의 기록보다 반복 성공률, 누적 운전시간, 가동률, 정비시간과 삼중수소 재고량이 더 중요하다.
핵분열의 역사도 원리 증명만으로 산업이 탄생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42년 최초의 제어된 연쇄반응과 1957년 시핑포트 원전 사이에는 정부가 부담한 시제품과 시험시설이 있었다. 미국은 잠수함 구획처럼 만든 육상 원자로 S1W에서 장치를 시험하고 운전원을 훈련했다. 이 경험이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호로 이어졌다. 핵융합에도 플라즈마 실험장치와 상업발전소 사이를 이을 '육상 시제품'이 필요하다. CPD는 바로 그런 역할을 지향할 수 있다.
예산도 단계에 맞춰 솔직하게 설계해야 한다. 영국은 2040년 첫 운전을 목표로 하는 STEP을 포함한 핵융합 프로그램에 최근 25억파운드의 추가 투자를 발표했다. 이 금액도 확정 총사업비가 아니라 다음 단계의 투자다. 해외 프로그램과 ITER, 국내 대형 연구개발사업의 규모를 참고하면 한국이 요소기술을 넘어 중수소-삼중수소 통합운전과 제한적인 발전 실증까지 책임질 경우 1520년에 걸쳐 총 8조12조 원, 연평균 4000억6000억 원을 준비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 확정 견적이 아니라 개념설계 이전의 정책적 범위이다. 초기 설계·시험에는 연 2000억3000억 원, 건설이 본격화되면 연 5000억7000억 원이 필요하다는 가정이며, 실제 금액은 34년 뒤 독립적인 비용검증을 거쳐 다시 정해야 한다.
8조~12조 원은 누리호 개발비를 여러 차례 투입하고 KF-21 개발사업과 견줄 만한 큰돈이다. 그러나 15년에 나눈다고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규모도 아니다. 문제는 비용이 크다는 사실이 아니라 적은 예산으로 더 큰 실증을 약속해 신뢰를 잃는 것이다. 현재 1조5000억원은 핵심기술과 시험 인프라를 위한 1단계, 통합장치 건설은 별도의 심사와 예산이 필요한 2단계라고 설명하는 것이 정직하다.
인력도 장치설계와 함께 준비해야 한다. 플라즈마와 자석뿐 아니라 원자력 재료, 열유체, 삼중수소 공정, 원격정비, 전력변환, 품질보증과 규제 전문가가 필요하다. 전담 핵심인력은 장기적으로 1000명을 훨씬 넘고 대학과 기업 공급망까지 수천 명의 생태계가 필요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독자적으로 핵융합 건설을 계획하는 미국 스타트업 CFS사의 인원은 1000여명으로 핵융합 플라즈마 전문가는 50여명도 되지 않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정부는 분야별 현재·부족 인원과 대학의 양성 규모를 담은 10년 인력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조직도 단일 연구소의 기존 사업을 확대하는 수준을 넘어야 한다. 별도의 국가 프로그램 조직에 설계·건설·운전의 권한과 책임을 주고, 독립적인 기술심사위원회구가 3~4년마다 계속·수정을 판단해야 한다. 다년도 예산을 보장하되 단계별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설계를 바꿀 수 있어야 장기 사업이 정치적 구호나 조직의 자기보존으로 흐르지 않는다. 필자는 핵융합 지지자로 "중단"이라는 평가는 제외하고자 한다.
ITER와 CPD를 양자택일로 볼 필요는 없다. ITER의 버닝 플라즈마, 삼중수소 취급과 원자력 품질보증 경험을 국내 설계에 적용하고, 한국 기술을 ITER에서 검증한다면 국제협력은 국내 역량의 지렛대가 된다. 성과도 분담금 집행률보다 확보한 설계능력, 데이터 접근권, 훈련된 인력과 공급망으로 평가해야 한다. 외국 기업과 협력할 때는 국내 실시권, 공동 지적재산, 원자료 접근권과 국내 공급망 참여를 계약에 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해외 스타트업이 정말 2030년 전후 핵융합 전력을 보여주면 어떻게 할까. 그것은 국내 프로그램을 중단할 이유가 아니라 전략을 조절할 계기다. '최초의 전기'와 높은 가동률, 삼중수소 자급, 경제적 정비와 두 번째 발전소 건설이 가능한 상업기술은 다르다. 이 기준까지 충족한다면 공동개발·지분투자·조건부 기술도입과 국내 실증을 결합해 시간을 줄이면 된다. 반대로 해외 일정지 지연돼도 국내에 축적된 플라즈마·소재·연료주기·규제 역량은 남는다. 한국형 프로그램은 국제 경쟁의 보험이자 협상력이다. 2030년 전후 독립적인 국제 기술평가를 통해 성공하면 일부 사업을 공동실증과 공급망 구축으로 전환하고, 실패하면 독자 개발을 계속하는 유연성도 필요하다. 핵융합은 2030년대의 구원투수가 아니라 토지와 자원 제약이 큰 한국이 2040년대 이후의 선택권과 고위험 산업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장기 연구개발이다.
일본 축구의 '백년구상'은 100년 뒤 월드컵 우승을 예언한 계획이 아니었다. 지역클럽과 유소년, 지도자와 리그의 기반을 세대에 걸쳐 만들겠다는 철학이었다. 일본축구협회는 별도로 2005년, 2050년까지 축구 인구 1000만명과 월드컵 우승을 목표로 제시했다. 중요한 것은 화려한 목표보다 그 목표에서 역산해 기반을 쌓는 일이다. 한국 축구도 보여주지 않았는가? 목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핵융합도 마찬가지다. 2030년대 전력 생산, 즉 시간을 목표로 잡지 말자. 한국은 비즈니스를 할 필요가 없다. 과학자, 공학자가 정부를, 또 국민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자. 핵융합 상용화, 그 목표를 역산해 플라즈마 운전, 열 배출, 중자실 재료, 삼중수소 연료주기, 정비와 인허가를 차례로 검증하자. 핵융합은 비싸고 오래 걸리며 실패를 거듭할 수 있다. 그러나 단계별 목표와 비용, 중단 기준을 공개한다면 실패한 시험도 다음 설계의 자산이 된다.
정부의 새 로드맵은 좋은 출발점이다. 핵융합에 작심하고 투자한다는 것은 낙관적인 날짜를 외치는 일이 아니다. 무엇을 시험하고, 어떤 인력을 키우며, 얼마를 투입하고, 어느 단계에서 다음 결정을 내릴지를 정직하게 준비하는 일이다. 연간 1조원을 투입한다고 해도 2026년 국가 총지출의 약 0.14%다. 결코 작은 돈은 아니며 정부 전체 연구개발 예산의 약 2.8%에 해당한다. 그러나 미래 에너지 선택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감당할 수 없는 규모는 아니다. 핵융합의 꿈을 검증 가능한 국가계획으로 바꿀 때 한국은 기술을 기다리는 나라가 아니라 그 가능성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나라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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